미국에 온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습니다. 목표했던 시간의 25%가 지나간 셈인데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치이고, 수업 준비와 과제에 에너지를 쏟고 나니 한 학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 느낌입니다.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그간 배우고 느꼈던 점을 간략히 정리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케이스 접근법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케이스 접근법이란?
HBS는 회계, 재무 등을 비롯해서 모든 수업을 케이스 접근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학생들은 수업전까지 평균 12 페이지 수준의 케이스를 읽고, 3-5페이지 정도되는 첨부 표/그래프/통계를 숙지해야 합니다. 재무 수업은 별도로 엑셀 파일을 만들어서 정리해야 합니다. 영어가 익숙지 않은 저는 평균 2.5시간 정도를 케이스를 읽고 이해하는데 썼지만, 영어가 익숙한 친구들은 보통 1.5시간 정도를 소요하는 것 같습니다. 수업이 시작되면 교수님은 한 학생에게 콜드콜을 해서, 주요 이슈가 무엇이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지에 대한 생각을 묻습니다. 보통 지난 2-3회 강의에서 발표를 한번도 하지 않은 학생이 콜드콜을 받는데, 당해보면 심장이 쫄깃해지기에 콜드콜을 기다리는 순간이 수업 시간 중 가장 스릴이 넘쳤던 것 같습니다. 콜드콜 발표가 끝나기가 무섭게 90여명의 학생들이 손을 들고 자신의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경험을 나누기도 합니다. 케이스를 미리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친구들의 코멘트를 이해하기도 어렵고, 손을 들 틈도 없이 1시간 반 수업 시간이 휘리릭 지나가버립니다. 발표를 하지 못하면 안타깝게도 해당 수업에 대한 기여도 점수가 0점입니다. 이를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조교가 학생들이 발표할 때마다 노려보고, 모든 코멘트를 일일이 기록하여 수업에 긴장감을 안겨줍니다.
케이스 접근법은 학생들이 배우는 것과 동시에, 친구들에게 기여를 해야할 의무를 가지는 수업 방식입니다. 제가 학기 초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가치있는 코멘트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생각이 많아지고 제 경험과 생각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하다 보니, 수업과 친구들의 코멘트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결국 흐름을 놓치고 아무런 이야기도 못했습니다. 교수님과 상담을 하기도, 친구들과 고민도 나누면서 나름 정립한 가치있는 코멘트는 ‘미국이 아닌 세계’의 관점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해고’가 일상화되어 있는 미국에서 ‘온정주의적’인 한국의 기업 문화를 소개하면 다들 흥미로워 하더군요. 더불어, 글로벌화에 우수한 사례로 소개된 영국계 RB에 대해서, 한국의 옥시 사례와 같은 반대 사례를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몇차례 코멘트를 하다보면, 영문법과 단어에 갇혀서 잘 떨어지지 않던 입이 점차 떨어져 이후의 코멘트는 조금 덜 부담스러웠습니다. 제 생각에는 HBS가 다른 학교에 비해 다소 미국 학생들의 비중이 높고, 이들의 목소리가 다소(?) 세기 때문에, ‘비미국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다양성 측면에서 주목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수업이 학생들의 코멘트에 의존하다보니 교수님의 역할이 제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의 역할은 질문을 통한 방향성 제시입니다. 방향성 제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였습니다. 케이스 접근법에 경험이 많은 교수님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들고, 좋은 코멘트를 이끌어 수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또한 수업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5분에 본인의 생각을 종종 전달하시곤 하는데, 이 시간이 치열한 토론의 전투를 마친 후 병사들에게 주는 물 한모금 같았습니다. 리더십 수업 시간 교수님의 코멘트를 공유합니다. 포츈 500 기업인 대너허에서 무려 15년간 CEO를 역임하고, 곧장 HBS에 교수님으로 오셨는데요, 해당 수업이 제게는 마치 매 시간 면접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교수님이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만약 내게 CEO 시절이 그립냐고 묻는다면, 단언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개인 비행기 그리고 수백억의 보너스 등 전혀 아쉬웠던 점이 없다. 다만, 한가지는 생각이 많이 난다. 바로 나와 같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의사 결정을 했던 ‘우리 팀’이다. 그들과는 정말 서로 신뢰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러분도 졸업 이후에 꼭 최고의 팀을 만나기를 바란다.
<마치 1년 내내 면접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해주신 컬프 교수님과 함께>
깊이가 없다. 임기응변을 가르칠 뿐이다.
케이스 접근법에 대한 가장 큰 비판입니다. 고민끝에 답변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당일 할당량을 채워나간다는 생각으로 즉흥적으로 코멘트를 하다보면 생각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토론시에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끔 어이없는 코멘트를 보면, 분명 얕다는 비판이 옳습니다. 그러나 케이스 접근법이 회사 생활을 떠올려보면 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보고서)을 읽고,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이를 다른 사람과 맞춰보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결코 많은 시간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친절하게 저자가 직접 생각을 설명해주면 좋겠는데, 제가 저자의 생각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글’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현실을 바탕으로 추정을 해야 합니다. 아카데믹 관점에서는 불경할 수 있으나, 현실 관점에서는 짧은 시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글로 이해하고, 나의 관점을 정립해서 의사 결정을 하는 케이스 접근법이 단언코 훌륭한 훈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너의 생각이 무엇이니?
눈치 빠른 분들은 위의 제 글에서 왜 이렇게 ‘나의’ 생각/관점/의견이 많이 언급되었나?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케이스 접근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꼽는다면 바로 제가 직접 문제를 정의해야 했던 점입니다. 얼추 계산해보니, 제가 회사 생활을 한지가 12년 정도 되었는데요, 90%의 시간은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케이스를 읽고 나서, ‘어라, 이게 다야? 어쩌란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나는 문제가 무엇 무엇이다 라고 친구들이 거침없이 얘기하는데 저는 정말 말문이 턱 막히더군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 의식에 어떻게 코멘트를 해야 할지 세상이 멈춘 느낌이었습니다.
한 학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름 중심을 잡으면, 친구들의 문제 의식과 어떤 부분이 차별화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조금은 가능하더군요. 반면 중심이 없으면, 교수님으로부터 카운터 질문을 받거나, 친구들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제 생각에 대해서 파고들면 정말 눈물을 쏠 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그래서 법륜스님이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스 수업에 대한 평가는 보통 40% 정도는 수업 참여도(얼마나 코멘트를 많이 했는지?)와 10-20%는 중간 고사, 40-50%는 기말고사를 통해 이뤄집니다. 중간 고사는 보통 개념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문제로 이뤄지고, 기말고사는 ‘철저하게’ 케이스로 시험이 치뤄집니다. 4.5시간 동안 케이스를 읽고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마케팅, 재무, 회계 등 모든 수업의 기말고사의 공통된 주제입니다. 평소에 비판적 사고가 부족했던 저는 오픈북임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해본다면, 케이스 접근법에 대한 제 첫 학기 점수는 60점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만의 생각을 정리해서 코멘트로 전달하는 부분이 부족했고, 기말고사에서도 문제 정의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시간 관리도 잘 하지 못했구요. 케이스 접근법은 단순히 적응이 아니라, 고착화되어 있는 제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학습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학기에는 제 자신에 대한 변화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지만, 분명 2학기에는 좀더 나아질 모습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