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에게 보고를 하면서 거절을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는 한국의 한 회사에서 9년을 일한 나의 경력을 입학 사정관이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미국/유럽 기준에서는 아예 필요없을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샘솟았다. 유학을 앞두고 있는 지금도 케이스 스터디 위주의 수업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토론 수업에서 나의 의견이 다수로부터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더군다나 함께 수업에 참여할 학생들은 에고가 강한 이들이 아닌가? 다수의 학생들 앞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 거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는 상상 속에서 오늘도 헤어나기 어렵다.
‘거절당하기 연습’은 유난히 큰 나의 거절에 대한 공포를 다소 완화시켜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베이징 출신의 저자 ‘지아장’은 듀크에서 MBA를 하고, 스타텁에 도전한다. VC로부터 투자 거절 이메일을 받고, 그는 좌절에 빠진다. 나였다면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 다시는 도전을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저자는 반대로 두려움에 대한 역치를 낮추기 위해 ‘거절 당하기 연습’을 시작한다. 경비원에게 가서 100달러를 빌려달라고 요청을 하거나, 크리스피 크림 도넛 가게에 가서 오륜기 모양의 도넛을 구워달라고 조르는 등 거절을 당하기 위한 시도를 거듭하며 그는 재미있는 인사이트를 얻는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편안함에 기대게 된다. 얼마전 번개에서 조우 했던 대학교 선배 형님은 내게 대학교 시절 호기심 가득했던 눈빛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대뜸 말씀하셨다. 가슴이 무언가에 찔린 듯 따끔했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부 선생님들에게 직접 편지를 쓰며 농구 동아리를 만들었고, 대학교에서는 무작정 중국 대학생들을 만나고 싶다고 학회를 만들었던 그때의 나를 지금 찾기 어렵다. ‘안될꺼야’ / ‘망신당할래?’라는 마음의 소리에 눌려 더이상 꿈 조차 꾸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왜 나는 점차 어른이 되어가며 여러가지 꿈을 포기했던 것일까? 번듯한 직장이 오히려 독이 되어, 이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서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중심으로 살아왔는지 철퇴를 맞은 기분이었다.
거절의 이유를 꼭 묻자. 보고를 하다보면, 소위 거절이라고 불리우는 빨간펜을 당하고 나면 이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이고 1분이라도 빨리 그 순간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왜 거절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이유를 고민해본 적은 없었고, 짐작으로 복심을 추정했을 뿐이다. 생각을 전환해보자. 거절은 상대의 일개 의견일 뿐이다. 즉, 거절을 당하는 과정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일부이고, 공감을 위한 발판이다. 거절 그 자체에 손사례를 치듯 물러서면, 거절은 상처로 남을 뿐, 결코 자산이 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나이스’한 방법으로 거절의 이유를 묻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면 거절은 경험이 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용기’라는 근육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거절의 공포로 나를 밀어내지 말자. 당당하게 ‘나’를 주어로 할 수 있는 만큼 의견을 개진해보고, 결과에 대해서는 컨트롤할 수 없는 별개로 밀어내보자. 그리고 결과에 대해 초연해지자. 한마디로 쟤가 그랬었는데…말을 줄이면서 비겁하게 옆으로 도망치지 말자. 거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 자신에 대한 탐험을 줄기로 놓으면, 오히려 거절이 내 생각을 정교화하기 위한 동기부여를 줄 수 있다.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말은 쉽지. 직접 거절을 당해봐야 그 기분을 알지. 물론 거절이 논쟁으로 발전될 기미를 보이면, 도망치지 말고 한발 후퇴해서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다. 거절을 협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필요하다. 다만 그 harsh한 순간에도 중심은 나의 생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거절을 당하는 끔찍한 순간에도 유머를 잊지 않는 클래스에 이르렀다. 수많은 거절을 강한 정신과 자신감의 밑거름으로 승화시킨 저자의 수많은 Practice가 소심한 내게 큰 응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