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술 사이 간격.

“자네 곡차는 하는가?”

몇일전 어르신께서 전날 과음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나의 얼굴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곡차’라는 단어를 국어 시간에 고전을 읽으면서 눈으로 본 이후, 십 몇년만에 귀로 들어 잠시 멍했지만, 이내 곧 무릎을 쳤다. 바로 ‘곡차’ 였구나! 그동안 우리는 ‘술’이라고 하는 품격없는 단어, 심지어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버리기 위한 배설구 같은 느낌마저 드는 단어로 이 세상의 맥주, 위스키, 와인을 묶어 왔던가? 피땀 흘려 주조한 양조업자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런 우아한 단어가 있었는데…

맥주는 몰트(싹튼 보리, 맥아)와 홉(장미과 식물의 꽃) 그리고 효모와 물로 만들어진다. 몰트에 옥수수, 밀, 쌀 등을 섞기도 하는데, 이런 ‘곡식’을 긴 기다림 끝에 발효시켜 맥주로 만든다. ‘차’역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우려내는 과정을 거친다. 홉은 씁쓸한 맛을 더해주는데, 풀내음이 가득한 첫맛과 쌉싸르름한 뒷맛이 공존하는 차처럼 맥주에 몰트와는 다른 풍미를 제공한다. 맥주가 바로 곡차인 셈이다.

한 Depth 더 들어가, 발효에 쓰는 효모의 종류에 따라, 상온에서 단기간 발효시키는 걸죽한 Ale과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시키는 상쾌한 Lager로 나뉘는데, 카스/하이트/Max 등 국내 맥주와 하이네켄/칼스버그 등 우리 주변의 맥주들이 대부분 Lager다. 과거 영국에서는 맥아에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한 사업자는 맥아를 볶는 것을 넘어 까맣게 태워 세금을 안내고 발효시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Ale 맥주인 기네스(Guinness)는 그 시대의 조세피난처였던 셈이다. 최근 관심을 가지게 된 IPA(Indian Pale Ale)는 영국에서 식민지인 인도까지 수출하기 위해 주조한 대표적인 Ale로 도수가 높은 묵직한 맛을 자랑한다. 이태원의 맥파이/더부스펍/크래프트웍스에 가면 다양한 레시피로 국내 중소 Brewery에서 제조한 IPA를 맛볼 수 있다. 차역시 발효의 정도에 따라 녹차와 홍차로 나누는데, 이쯤되면 맥주를 맥차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잠시 Ale관련된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자면, 처음 Ale을 맛본건 영국 런던 근교의 작은 도시인 솔즈버리에서 바르셀로나와 아스날간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면서 마신 Bombardier였다. 마치 에스프레소를 처음 마실 때의 느낌처럼 진하고 무거운 맛이 마치 한약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3잔째부터 곧 달달한 맛과 씁씁한 맛이 공존하는 Ale의 매력에 빠졌고, 귀국한 이후 그때의 맛을 찾기 위해 New Castle Ale을 병으로 마셔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심지어 ’11년 영국에 갔을 때, Bombardier를 애타게 찾았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 때의 맛을 생각하니 침이 고일 뿐이다.

몰트는 홉과 섞어 맥주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발효시켜 증류한 후, 오크통에 숙성시켜 위스키로 만들기도 한다. 차잎을 말리는 과정과 유사하게 숙성 과정에서 오크통의 은은한 향과 주변 공기의 내음이 베인다. 한 증류소에서 생산한 위스키액을 모은 것이 Single Malt 고, 한 오크통에서만 병입한 위스키를 Single Cask 라고 한다. 미국의 잭다니엘사는 이해가 쉽게 Single Barrel 위스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역시 Single로 갈수록 몸값(?)이 올라간다. Blended 위스키처럼 차역시 향을 위해 농장별 차잎을 섞기도 하지만, 역시 최고의 차는 섞지 않은 순수한 한 농장의 땅내음이 아닐까?

역시 한 depth더 들어가,왜 위스키는 연차가 높을 수록 몸값이 올라갈까? 개인적으로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연차가 높을 수록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시간이 길어져, 그만큼 증류소의 독특한 풍미가 위스키에 베인다. 스코틀랜드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사나운 바람이 위스키에 담길 확률이 더 높아진다. 둘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 증발이 된다. (땅과 인력을 요하는) 양조 시간이 길어지고, 위스키의 양까지 줄어든다면 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마지막으로, 알코올은 더 빠른 속도로 증발한다. 그래서 연차가 높아질 수록 원액의 알코올 도수는 낮아지며, 이에 일정한 도수를 맞추기 위해 희석하는 물의 양이 적어진다. 즉, 원액:물의 비율이 연차가 높아질수록 높아져, 원액 맛에 더 가까워지고, 술에 물을 덜 타도 된다.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에서 축구보다 쉐리 와인을 먼저 떠올린건 짐로저스가 죽기전에 꼭 해봐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달달한 쉐리와인의 향은 아직도 선명한데, 맥캘란 위스키가 바로 이 쉐리와인을 숙성시켰던 오크통을 재활용해서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고 하니, 맥캘란에서 그때의 향을 떠올려도 큰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와인을 끓여 꼬냑을 만들고, 청주를 만든 후, 남은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드는 등 이처럼 ‘곡차’는 상호 플랫폼을 공유하기도 하고, 서로 연결된 공생 관계이기도 하다. 또한 자연의 섭리대로 발효의 정도를 달리하며, 다른 맛을 창조해내니, 끝이 없는 곡차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겸손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