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나는 베이징(北京)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가는 기차 안에 몸을 싣고 있었다. 시간에 딱 맞추어 타서인가? 기차가 타기가 무섭게 출발한다. 밖을 보니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소떼를 몰고 천천히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목동의 모습에서 푸근함 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고요함도 잠시, 앞에 앉은 여학생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하이말로 자기들끼리 히히덕 거리며 떠든다. 문득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집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놀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을 보지 못한 것도 50일이나 지났나? 이제 이번 여행이 끝나면 바로 서울로 돌아가니까 곧 모두들 만나 볼 수 있겠지. 50일이라는 기간동안 없어진 것이 있다면 중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리고 설레임을 들 수가 있고 생겨난 것이 있다면 배짱을 들 수가 있겠다. 그래도 아직은 1992년에 이루어서야 비로서 수교가 이루어 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시작되었지만 수많은 한국인이 실종된 나라, 6.25 전쟁 이후 북한과 형제 사회주의 나라라는 두려움에 문득 여권은 잘 있는지 주머니를 뒤적여 본다.
14시간이 걸려서야 비로서 상하이에 도착했다. 한번 크게 숨을 들이셔 본다. 베이징과는 다른 향기가 난다. 이곳이 정말 중국 최고의 상업도시 상하이란 말인가? 상하이의 중심부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베이징에 처음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릴 때의 그 설레임이 재현되기에 충분하다. 기쁨도 잠시 길을 묻고 물어 지하철에 탑승했는데 마치 우리나라 러쉬아워를 연상케 하듯 정장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꼭 끼어 괴로워 하며 서로의 목적지를 행해 가고 있다. 이상해서 시간을 보니 오전 8시다. 이곳에서도 역시 러쉬아워였던 것이다. 불평을 할 틈도 없이 “샨시루(陝西路)” 역에 도착했고 난 내려서 서둘러 지도를 확인한 후 음악학원(중국에서의 학원이란 우리나라의 전문대학을 뜻합니다.즉 상하이 음악 전문 대학이죠.)을 찾아 큰 배낭을 매고 찾아 헤매었다. 친절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학원을 찾을 수 있었고 학원에 도착하여 숙소를 잡았다. 숙소를 학원의 기숙사로 잡은 이유는 방학이었기 때문에 많은 중국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싼값에 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틀고 대나무 장판 위에 누우니 절로 잠이 온다. 아마도 기차 안에서 앞에 앉았던 여학생들이 밤새 떠드는 터라 잠을 한숨도 못잔 탓이리라. 잠시 꿈속에서 서울을 다녀온 후 가뿐한 몸으로 시내에 나섰다. 인민공원에 들어가 중국인들의 여유로운 생활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 보기도 하고 수많은 상점의 쇼윈도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서있기도 해보니 어느덧 두어 시간이 흘러 갔다. 이제 해는 서쪽하늘 위에서 아쉬운 하루를 작별하려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복숭아 한 개 먹고 그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침,점심 값을 아꼈으니 저녁은 근사하게 먹어 봐야 겠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상하이의 특산 요리인 ‘게’요리로 정하고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다는 “왕빠오지우지아(王寶酒家)”라는 식당으로 갔다. 가격에 감탄하기도 하고 입에서 살살 녹는 게살의 독특한 맛에 감탄하기도 하며 식사를 마치고(후에 중국산 게에서 납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에 찜찜했지만…) 서둘러 “난징루(南京路)”라고 하는 우리 나라의 명동에 해당하는 큰 거리로 향했다. 도착하기도 전에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화려한 네온사인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50여일 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베이징에서도 전혀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표정을 지으며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시끌벅적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문득 그들 틈 속에서 고향생각도 나고 외롭단 느낌도 조금은 들었지만 난징루 한복판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삼성전자’와 ‘지오다노’ 광고를 보며 레코드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안재욱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숙소에 돌아온 후에도 아직까지 그 많던 사람들 속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얼얼하다. 그렇게 상하이에서의 첫날밤은 흘러갔다.
상하이에서의 여행2일째 오늘은 본격적으로 상하이 관광을 시작하자! 먼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달려 갔다. 상하이 사람들 조차 정부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길을 물어도 그들도 역시 잘 몰랐다. 여행서에 나와 있는 대로 주소를 따라 차근차근 찾다 보니 거리의 구석에 조그맣게 한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쓰여져 있는 간판이 보였다. 간단한 비디오 감상을 하고 김구 선생이 사용하셨던 좁고 초췌한 집무실과 침실을 보고 나니 이유 모를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뭉클함이 이제 겨우 시작이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다시 나와 버스를 한번 갈아 타며 찾아간 “홍커우 공원(虹口公園)”! 중국의 계몽 문학인인 루쉰(魯迅)의 기념 공원이기도 한 이 곳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 30분 정도 공원 구석 구석을 전부 돌아 다니다 보니 한글과 중문으로 ‘이곳은 윤봉길 의사께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신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는 조그마한 바위를 발견했다. 그 동안의 나의 외로움 그리고 조국에 대한 원망 등이 부끄러움으로 한 순간에 승화되었다. 몇분 정도 멍하니 바위 앞에 서있다가 공원에서 나오는 길에 출구 바로 옆 공원 내에 커다란 ‘중일 우호 식당’이 일본 자본으로 세워져 버젓이 홍커우 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니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저녁때는 영화 ‘상해탄’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상하이와외탄(上海外灘)”을 거닐며 유럽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보기도 하고 황포강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는 2학기의 소원도 빌었다.
여행 제 3,4,5일에는 “上有天堂下有蘇杭”-하늘에 극락이 있다면 땅에는 쑤조우(蘇州), 항조우(杭州)가 있다-라고 불리 울 만큼 아름다운 지상 낙원 쑤조우와 항조우를 기차타고 가서 자전거를 타고 도시 곳곳을 돌며 여행했다. 상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내용을 모두 싣는다면 상하이 여행기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어설픈 짧은 글 솜씨로 각 도시의 자연을 묘사할 경우 쑤조우와 항조우를 모독하는 것 같아 생략한다. 다만 항저우의 시후(西湖)에서 소동파가 시를 쓴 곳 바로 그 자리에서 직접 쓴 어설픈 시가 한편 있다. 그 시를 잠시 소개하자면
西 湖 夜 來 深 – 시 후 예 라이 션 – 서호의 밤은 깊어져 가고
風 雲 下 來 親 – 펑 윈 씨아 라이 친- 풍운은 내려와 지면에 입맞춤하는구나
看 向 東 流 水 – 칸 썅 똥 리우 슈에이-동쪽(한국)으로 흘러가는 물을 보니
要 問 蘇 東 心 – 야오 원 쑤 똥 신-소동파에게 그의 마음을 묻고 싶구나!
친구는 너의 위치의 현재 팬이 되었다!